본문 바로가기

MKCSA,문화공유

몽골 불교 재조명, 다시 일어서는 불교. 윤회의 초원 몽골을 가다. 달라이라마 법회로 신심 재발견

728x90

무기가 된 불상, 그 역설 속에 핀 연꽃을 보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 간단사에는 무게 900톤, 높이는 26.5미터에 달하는 몽골 불교의 심장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절로 신심이 나는 불상을 보고 나오니 부처인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새삼 부끄러웠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자기 마음자세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마음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는 희망 때문에 날마다 설렘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순례 중 3일을 머문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의 생활은 약간의 지루함과 나른함이 묘하게 뒤섞였다. 마음을 끄는 무언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내리쬐는 태양과 푸른 하늘, 몽골인들의 웃음소리, 어지러운 교통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들과 따끔거리는 미세먼지. 어느덧 일상이 된 것 같은 울란바타르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푹푹 쬐는 태양을 피해 뭔가 두근거리는 일에 골몰할 수 있기를…. 위대한 발견을 꿈꾸는 순례자의 마음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간단사에 발을 들여 놓고서야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몽골 불교의 중심 간단사는 ‘완전한 기쁨을 가진 위대한 곳’이란 뜻이다. 간단사는 이름 그대로 몽골인들에게 완전한 기쁨을 준다고 한다.

 

1809년에 짓기 시작해 1913년에 완공된 간단사가 몽골인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유는 이곳에서 기도하면 내세에도 다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티베트와 몽골 울란바타르를 부처님의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에 죽기 전에 꼭 한 번 간단사에서 기도하는 것이 최대 소원이라고.

 

특히 간단사가 신성시되는 이유는 불교 지도자인 벅뜨들의 무덤이 사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원도 스탈린에 의해 여느 사원처럼 그리 순탄치 않은 굴곡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1841년 제5대 벅뜨와 1869년 제7대 벅뜨, 1925년 제8대 벅뜨의 무덤이 사원 안에 있었으나 스탈린에 의해 벅뜨의 무덤들은 모두 파괴됐다. 불교 탄압은 계속돼 간단사 스님들도 모두 쫓겨나거나 처형당했으며 많은 전각들이 먼지가 됐고 현재는 여섯동의 전각이 남았다.

 

입을 쉬지 않는 어기 씨의 설명이 귀에 와 닿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간단사 중앙에 있는 전각 안 거대한 높이의 관음보살입상을 향해 있었다. 법당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천정으로 꺾인 목을 굽힐 수가 없었다. 떡하니 벌어진 입모양이 부끄러울 사이가 어디 있으랴. 연신 셔터를 눌렀다. 몽골 불교의 심장이라는 불상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발을 내디딜 것 같았다.

 

원래 이곳에는 제8대 벅뜨가 1911년에 조성해 1913년에 완성한 20톤 규모의 대불이 있었다. 금 44kg, 은 55kg과 400여 개의 보석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나라와 가정의 복을 빌기 위한 몽골인들의 염원을 담았지만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조각조각 분해돼 러시아로 보내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러시아에서 이 불상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뭇생명의 존중을 상징하는 불상이 살상용 무기로 변하다니…. 그 아이러니와 마주한 놀라움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몽골 불교를 상장하는 간단사.

 

 

1990년 종교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불상을 다시 조성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재정과 거의 모든 몽골인들이 후원금을 냈고 돈이 없으면 물건을 내놓았다.

그렇게 지금의 관음보살입상이 1996년 10월 26일에서야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무게가 무려 900톤에 이르고 높이는 26.5미터에 달한다. 불상의 팔은 네 개이며 두 손은 거울과 감로수를 담은 정병을 들었고, 나머지 두 손을 모아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설날과 부처님오신날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관료들과 국민들이 와서 기도를 한단다. 할머니와 손자, 젊은 남녀, 부부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밖으로 나왔다. 절로 신심이 나는 불상을 보고 나오니 부처인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새삼 부끄러웠다.

 

 

승단에 예경 지극한 몽골 불자들

 

걸음마도 채 떼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사원을 찾아 후르뜨를 돌리는 가족.

 

 

불상이 있는 법당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담한 마당이 나왔다. 수많은 비둘기 떼가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어기 씨는 동물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큰 공덕이라며 할머니에게 쌀 모이 한 봉지를 냉큼 사 비둘기에게 줬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지만 순례자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어 마음만 함께 했다.

 

어디서 경전 읽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들이 공부 중이라고 한다. 사진촬영을 위해 법당 안으로 들어섰지만 이내 스님들에게 제지 당했다. 그러나 스님 한 분 한 분에게 마유주를 따라주며 스님들이 앉은 책상에 이마를 대는 몽골인들에게서 한국불자들에겐 쉽게 보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발견했다. 짧은 탄식이 나왔다.

 

그 지극함이란…. 삼삼오오 가족이나 연인끼리 스님들의 경전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몽골인들은 티베트어를 모른다. 그래도 스님들이 티베트어 경전을 읽는 동안 듣고 앉아있다. 듣고만 있어도 공덕이 쌓인다고 믿기 때문에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법당 밖을 도는 몽골인들을 따라 스님과 그들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법당 밖에는 한국 사람들이 마니차나 윤장대로 부르는 후르뜨(경전 문구가 새겨진 둥근 통)가 법당을  에워싸고 있었다. 몽골인들 틈에 섞여 후르뜨를 돌렸다. 법당 뒤에 이르자 흰 벽의 딱 세 곳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어기 씨에게 이유를 물으려다 말았다. 한 노인이 그곳에 무릎을 대거나 이마를 대며 조용히 합장했다. 아픈 곳을 비비면 낫는다고 믿는단다. 검게 그을린 곳은 법당 안에 불상이 자리한 곳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몽골 불교의 중흥은 뜻밖의 인연에 의해 시작된다.

1944년 미국 부통령이 몽골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가 불교 국가인 몽골의 사원을 꼭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소련은 군 막사나 마구간으로 쓰던 간단사의 관음전을 비롯한 벽돌 건물 몇 곳을 사원으로 개조하고 미국 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황급히 스님들을 찾았다.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님 7명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고 절과 의식들을 복원해가며 몽골 불교의 기초를 다졌다.

 

 

그것은 전초전이었다. 몽골인들의 불심은 약간의 바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불씨는 달라이라마의 몽골 방문으로 활활 타올랐다. 1995년 달라이라마가 칼라챠크라 법회를 열기 위해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달라이라마에 대한 몽골인의 열정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 격렬했다.

 

달라이라마가 간단사에서 며칠 간 법회를 하는 동안 그의 법을 듣기 위해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연일 차가운 비가 내렸다.

그러나 우산 하나 없어 정성을 다해 차려 입은 옷을 다 적시고도 며칠씩 비를 맞았다.

 

그렇게 추위에 떨면서도 끝까지 그 고행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에 대한, 법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몸부림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달라이라마 법회로 신심 재발견

 

스님들이 독송하는 경전을 듣고자 삼삼오오 모여 앉은 몽골인들.

 

 

문득 간단사에서 만난 몽골불교미술대학 학장 푸레밧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푸레밧 스님은 스님을 친견하러 온 아이들에게 축원을 해주며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도 불교의 스승을 따른다.” 그 웃음이 몽골불교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하루하루가 반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을 찾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네 마음 탓이 아닐까. 일체유심조라 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어도 세상은 제 속살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타르의 밤. 그네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볼 뿐이다. 그 마음을 믿는다. 그들도 마음을 깊이 알아차릴 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테지. 어둠 속에 속살을 감춘 그곳에서 나는 다시 일어나는 몽골 불교를 보았다.〈끝〉

(출처, 법보신문 / 몽골을 가다.2009.10)

 

 

 

 

[윤회의 초원 몽골을 가다] 3. 불교, 그 안타까운 찬란함

 

적막한 초원 위 순백 사원만이 제국의 옛 영광 전해

 

몽골 최초 티베트 사원 에르덴조. 흰탑들이 호법신장처럼 둘러싼 이 사원(왼쪽 사진)에는 몽골불교의 위대한 선지식 쟘마바자르의 아버지 무덤이라 전해지는 흰탑이 있다.

 

 

바양고비 캠프 게르 안 엷어진 온기가 멀어져갔다. 대신 망망한 초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이 이른 아침의 한기를 한 줌 떼어갔다. 곧 채비를 했다. 아침을 먹고 몽골의 옛 수도 하르허린으로 떠나야 했다. 어젯밤 몸을 의지한 게르를 등졌다. 간밤에 신세졌던 게르에 고마웠단 눈인사를 건넸다. 캠프를 운영하는 몽골인들과 야생동물로부터 밤새 캠프를 지킨 검은 개 한 마리가 배웅을 나왔다. 차가 일으키는 먼지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네들의 실루엣에 손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꼬리를 흔들며 배웅하던 검은 개의 잔상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눈이 또 충혈됐다. 미세먼지는 코끝까지 간질이고 재채기는 그칠 줄 몰랐다. 아침 일찍 나선 여정에 수난은 계속됐지만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툴툴거리는 마음을 달래주었다. 눈에 가득고인 눈물을 닦아내기를 수십 차례.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남서쪽으로 370km에 이르러서야 오르혼 강 연안에 위치한 옛 수도 하르허린에 도착했다.

 

그 옛날 카라코롬이나 하르허롬이라 불렸던 하르허린. 광활한 제국의 옛 수도였던 이곳은 1235년 칭기스 칸의 아들 우구데 칸이 도시를 중심으로 성을 만든 후 두멩 암갈란트라는 궁궐을 도시 서남쪽에 세웠었다. 궁은 모두 64개의 기둥으로 이뤄졌고 높은 기둥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했다.

 

1253년 두멩 암갈란트에서 칭기스 칸의 손자를 만났던 프랑스 프란체스코회의 수사 루브룩은 당시의 하르허린을 이렇게 묘사했다.

 

“왕은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하기에 도심에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건물이 12곳에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신에게 예배한다. 서양과 동양 문화를 연결하는 이 도시가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화, 경제, 무역 등의 중심지였다.”

 

 

한때 100여 법당에 천여 명 스님 거주

그러나 천하를 호령했던 몽골의 옛 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몽골 최초 티베트 불교 사원 에르덴조에 발을 내디딘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에르덴조 사원은 칭기스 칸의 스물 한 번 째 후손인 압테 칸의 주도로 1586년 첫 전각인 ‘조’를 시작으로 건립됐단다. 그러나 청나라의 침략으로 완전히 버려졌다.

 

이후 찬란했던 몽골 제국의 옛 궁궐 터에서 발견된 석주, 벽돌 등 다양한 건축자재를 사용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불사가 계속돼 지금의 에르덴조 사원이 있게 된 것이다. 당시 100여 개의 법당과 300여 게르에 1000여 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었고 108명의 무용수가 있었으며, 매년 장엄한 종교의식이 열렸었다. 허나 지금은 1930년대 종교를 허락하지 않는 스탈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맨 처음 지어진 세 개의 전각과 그 밖에 15개의 전각을 남기고 모두 쓸쓸한 먼지가 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귀를 솔깃하게 했던 사실은 건축물에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에르덴조 사원의 매력은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탑이었다. 파란 물감을 몽땅 뿌려놓은 듯한 하늘 아래 호법신장처럼 사원을 둘러싼 흰 탑들. 가이드 어기 씨의 말로는 사원 외벽 사방에는 각각 23개씩 92개와 네 모서리 밖으로 각각 2개씩 8개 그리고 사원 중앙의 흰 탑 6개와 전각 앞 2개를 합하면 모두 108개가 있다고.

 

벽에 천개의 불상이 안치돼있다고 해 천불전이라 불리는 전각 ‘조’를 먼저 참배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35세 때의 석가모니 본존불이 순례자를 맞이했다. 좌우 협시불로는 서쪽에 건강을 지키는 불상, 동쪽은 아미타불이다.

 

삼존불 앞에는 부처님의 네 제자를 형상으로 만든 불상, 그리고 그 앞으로 다시 8개의 불상이 봉안돼 있다. 전각 입구 문 동쪽에는 절을 지켜주는 호신불과 서쪽에는 불법을 지키는 여인상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모습에 오금이 저렸다.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모습이 너무 괴기스럽다며 팔에 돋은 닭살을 쓸었더니 사원 안내자가 빠른 몽골어로 설명했다. 말인 즉 이렇다.

 

원래 남성 불상 9개와 여성 불상 1개가 있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악귀를 죽이라고 보냈지만 오히려 그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하여 마지막에 한 여인만 남았는데 그녀는 악귀와 결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악귀가 방심한 틈을 타 죽였다. 그녀의 섬뜩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악귀의 가죽을 노새 등에 덮은 후에 그 위에 자기가 앉고, 악귀와 자신의 자식을 죽여 입에 물고 돌아왔다. 전각에는 그 모습 그대로 형상화돼 있다.

 

불자이고 뭐고 급히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잔인한 여인의 이야기를 애써 외면했다. 사원 중심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몽골 민족이 배출한 수많은 라마 가운데 가장 위대한 라마 중 한 명인 현자 쟘마바자르(1635~1723)의 아버지 무덤으로 알려진 흰 탑이 있다. 본명이 이쉬덜쥐인 쟘마바자르는 몽골 불교에서 벅뜨(티베트 불교의 수장)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다. 그는 1638년 티베트에서 온 스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 성인(달라이 라마)으로 인정받아 쟘마바자르라 불리기 시작했다.

 

 

샤머니즘 흡수로 몽골불교 토대 마련

 

 

아무튼 이 탑에 아기를 어깨에 들쳐 멘 스님과 두 여인이 오체투지로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흰 탑 앞에서 온몸을 낮춘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바람들이 담겨 있었을까. 그러나 몽골인들의 지극한 불심 한가운데는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몽골의 종교’의 저자 이평래 교수는 전통신앙인 샤머니즘의 특정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방법으로 화해를 모색하면서 불교가 몽골인들의 가슴에 자리했다고 분석했다.

 

원래 몽골인들은 영원한 하늘이자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 뭉케 텡그리(텡그리는 하늘 신을 일컫는다)를 믿는다. 여기에 티베트 불교는 뭉케 텡그리 신화에 불교를 주입해 변형시키는 일을 한다.

 

아주 먼 옛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물로만 뒤덮여 있었던 때. 호르무스타 텡그리는 가릉빈가를 보냈다. 가릉빈가는 깃털을 뽑아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그 둥지 위에 내려앉은 먼지가 쌓여 차츰 흙이 생겨나 오늘날처럼 흙으로 뒤덮인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로 대체된다. 16세기 알탄 칸 시대 이후 갑자기 등장한 호르무스타 텡그리. 자연에 대한 몽골인들의 지극한 숭배와 경외심을 이용해 몽골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 이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원나라의 부활을 막기 위해 몽골인들의 불심을 이용했다.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는 척 하며 큰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들을 출가시키라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한 때 남성의 30%가 스님이었다는 존경심도 모래알을 씹는 불편함 앞에 서먹서먹해졌다.

 

불교란 지역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민중에게 오래 기간 전통종교로 자리잡았다는 교과서적인 해석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전통신앙이던 샤머니즘을 배척하려던 티베트 불교와 라마승들. 그네들은 결국 샤머니즘을 불교화해 몽골인들의 가슴을 정복했던 것이다.

(출처, 법보신문 윤회의 초원 몽골을 가다 / 2009. 09. 21)

 

 

[윤회의 초원 몽골을가다] 1.유목민의 삶, 도시민의 삶

윤회 순응하던 초원 등지고 게르 짊어진채 도시로 발길

 

초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뜀박질을 시작할 무렵부터 하루 종일 가축을 돌보는 것이 일상이 된다.

 

 

한반도의 약 8배인 156만㎡에 이르는 땅을 가졌으며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나라. 끝을 알 수 없는 들판에 펼쳐진 초록 생명과 거친 모래바람이 머무는 사막이 공존하는 곳. 한 때 남자 인구의 30%이상이 스님이었던 불교 국가였으나 구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3만 여명 이상의 스님들이 학살당했던 비극의 나라 몽골. 이곳에 깃든 생명들은 어지럽게 뒤엉켜 윤회의 굴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순례 첫날 마주한 초원은 지루할 정도로 광활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옛 수도 하르허린을 향해 남서쪽으로 5시간이나 쉬지 않고 달려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초원, 초원 그리고 초원. 답답하기까지 했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게르(나무와 양털을 이용해 만든 둥근 모양의 몽골 전통 집)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과 염소, 말 등 가축만이 심심한 순례자를 달랬다.


초원의 삶은 아름답고 고되다

“참 평화롭네. 여기 살면 자유롭겠다.” 순례자의 감상어린 말에 가이드 어트겅자르 갈(행복한 막내라는 뜻, 애칭 어기) 씨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 않다는 거다. “수도 울란바타르에 사는 도시민 보다 시골에 사는 유목민이 더 바빠요. 가축을 돌보는 일이 아침부터 얼마나 할 게 많은데요.”

실제 몽골 유목민의 하루 일과는 새벽 미명이 어둠을 몰아낼 때부터 시작해 별이 뜰 때까지 쉬지 않는다. 아이가 뛰어 다닐 정도가 되면 그 때부터 자기 몫이 주어진다. 아침이면 어머니를 도와 가축의 젖을 짜야 하고, 가축 우리도 청소해야 한다. 또 땔감으로 쓸 마른 소똥을 모으고, 물이 귀한 초원에서 물을 긷기 위해 먼 곳까지 다녀와야 하는 것도 아이의 역할이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깨워주고 밥상을 차려주며 씻겨주고 옷을 입혀주던 순례자의 과거는 몽골 초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의 경우도 삶이 지속되는 동안 고단한 하루는 계속된다. 한국사회와 같이 자식을 돌보고 당장 먹어야할 음식을 준비한다. 새벽같이 가축의 젖으로 수테차라는 따뜻한 우유차를 만든다. 영하로 온도가 떨어지는 겨울과 봄에 먹을 식량도 미리 준비해야하고 가축의 털을 깎거나 젖을 짜는 일 역시 여자의 몫이다.

게다가 의복을 만들거나 게르를 지을 때 필요한 천도 짜야 하는 것이 여자의 하루다. 그렇다고 성인 남자가 놀고 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작열하는 태양과 바람, 눈, 비 등 자연과 피부를 맞대고 있어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축을 몰고 그늘도 없는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먹인다. 밤이나 낮이나 늑대 등 야생동물로부터 가축을 지켜야 한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가축에게 풀을 먹이는 유목민.



8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그네들이 일상은 마치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었다. 초원에서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가 초원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 비가 오기 전 비의 냄새를 맡고, 바람이 불어오기 전 기척을 감지한다는 그네들의 능력은 초원의 생태계에서 편입돼 살아가는 처절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초원에 덩그러니 동그란 게르 하나 놓여 있으니 세상 걱정 하나 없이 보인다는 순례자의 말은 이방인의 철없는 감상에 불과했다.


누구나 유목민의 삶은 계절 따라 정해진 초원으로 이동하는 순환적인 삶의 방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묻자. 왜 일까. 본디 자연의 섭리는 순환이다. 굳이 불교 용어를 들자면 윤회다. 진리다. 물은 수증기로 화해 구름을 이루고 비를 내린다. 비는 다시 대지로 스며들어 초목의 생명을 잉태하고 가축과 인간을 기르며, 강과 바다를 이룬다. 강과 바다는 다시 구름이 된다. 생명의 원천은 돌고 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자연의 섭리에 기대어 사는 것 뿐이다. 그렇게 몽골 유목민들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사는 것이다.

허나 만약 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초원은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다. 인간이 조금만 손을 가해도 자연의 섭리는 틀어진다. 가축들은 먹이 부족으로 풀뿌리까지 먹을 것이고 그러면 초원은 1년도 되지 않아 황무지로 변한다. 그 피해는 바로 유목민들에게 돌아온다. 순환, 윤회라는 자연의 섭리는 생명과 직결돼 있었고 진리를 피부로 깨달은 그네들에게 이동은 절대적인 것이다. 실제 중국에 합병된 내몽골의 경우 한족의 초원개발과 몽골족의 정착농경생활을 강요당하면서 무분별한 지하수의 이용으로 초원의 사막화가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도시 주변엔 빈민촌이 번져나가

그래서 물은 신과 동일시 여긴다. 생존에 필요한 수분을 가축들의 젖으로 보충한다고 해도 물은 모든 가축이나 인간에게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몽골 제국을 완성한 칭기즈칸은 자신이 만든 법전 예케 자사크(Yeke Jasak)에서 거듭 물의 소중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어긴 자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몽골 유목민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물의 양이 한 가구당 30리터 내외란다.

그러나 몽골에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고 이후 수도 울란바타르에 인구가 밀집하면서 다수의 몽골인들은 자연의 섭리를 버리고 있다. 약 300만명의 인구 중 100만명이 울라바타르에 몰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언저리에는 서울 시내 판자촌처럼 게르촌이 무성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버스 노선도 거의 없어 물품을 구하러 3시간씩은 걸어 다니고, 택시들도 게르촌 주변에는 강도가 많아 잘 가지 않는다는 어기 씨의 말에 씁쓸함이 혀끝을 맴돌았다.

7년 동안 몽골 고원을 돌아다녔던 한성호 씨가 묘사한 유목민들의 말 젖 짜는 태도는 눈물겹다. 오죽했으면 ‘경건한 종교의식’ 같다고 했을까. 유목민들은 처음으로 출산을 마친 말 젖을 짤 때 말에 대한 존경과 박애 그리고 연민을 표한다. 첫 젖을 짜는 어미 말에 붙은 모든 진드기를 떼어 주고 먼지를 깔끔히 털어내 몸을 깨끗하게 닦아준다.

그리고 말 머리를 해가 뜨는 동쪽에 두고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절을 세 번 한다. 이어 하닥(푸른 천, 하늘의 색과 같은 푸른색을 숭배한다)을 말머리에 비비며 푸른 하늘이 땅을 보살피고 땅의 신들은 말을 보살펴 영원한 젖의 풍요가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만약 말이 잉태하지 않고 우유가 나오지 않는다면 망아지뿐만 아니라 유목민도 굶어야한다. 유목민들은 말 젖으로 아침마다 수테차를, 마유주라는 발효주를 만들어 물처럼 마시기 때문이다. 말의 젖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식량을 얻는 자들이 말에 대해 경건한 감사와 염치를 다하는 것이리라.


초원의 어머니와 아이는 수테차를 끓이기 위해 아침부터 가축의 젖을 짠다.

몽골까지 와서 안 먹어 볼 수 없기에 사다 마신 마유주는 새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말 냄새가 물씬 풍기며 혀를 자극하는 강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자 어기 씨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웃는다. 여름이면 스님들도 즐겨 마신다는 마유주의 첫 경험은 야쿠르트보다 더 시큼한 맛과 진한 말 냄새 탓에 얼굴에 심한 주름만 남겼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그네들을 보면서 순응은 고독한 인내를 수반한다는 것을 알았다. 추위와 배고픔, 먼 거리의 이동 등등. 하늘과 땅을 숭배하며 자연에 기대어 살다보니 샤머니즘이 발달한 것도 그네들의 생활에서 비롯됐으며, 샤머니즘과 합일된 불교 인구가 90%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목 생활이라는 고독한 인내 속에서 영혼의 오아시스를 찾으려는 몽골인들. 그네들의 오아시스를 찾아 몽골불교에 경건하게 첫발을 내디딘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최초의 감동을 붙잡겠다.

출처 :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